웰다잉소식

1990년대 초였던 걸로 기억한다. 서울 큰 병원에서 위암 수술 후 몇 년 뒤 재발해 말기 판정을 받은 기자의 할머니는 시골집으로 내려와 생의 마지막을 보냈다. 당시만 해도 연명의료 보류·중단이나 호스피스, 생애 말기 돌봄이니 하는 개념이 없던 때였다. 병원에서 ‘더 이상 해 줄 게 없다’고 하니 가족이 상의해 할머니를 집으로 모셨다. 살던 곳에서의 죽음이 드물지 않았던 그때만 해도 이런 일은 크게 문제 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한참 지나 관련 법·제도가 생겼다. 2009년 ‘김 할머니 사건’ 판결로 존엄하고 품위 있는 죽음이 사회 화두로 등장했고 오랜 논쟁을 거쳐 2016년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연명의료결정법이 탄생했다. 특히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핵심으로 하는 연명의료 결정 제도는 법 제정 2년 뒤부터 시행됐다. 만일 할머니의 마지막 생애 시점이 지금이었다면 의사는 할머니가 임종 과정인지 단순 말기인지 판단하고 연명의료에 대한 평소 뜻이 있었는지, 가족이 합의했는지 등 문서상 복잡한 절차들을 따지는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법 시행 후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생애 말기 환자들은 이제 자기 뜻대로 존엄한 죽음을 맞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연명의료에 대한 사전 의향서 작성자가 300만명을 넘었고 90% 넘는 서명자들이 불필요한 연명의료 중단을 택하지만 실제 의료 현장에서 받아들여진 경우는 13%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있다. 또 장기요양 돌봄 노인 10명 중 7명가량은 임종 장소로 살던 집을 희망했으나 실제 자택 임종은 14%에 그친다는 조사도 있다. ‘법 따로 현실 따로’, 즉 여전히 제도가 현장에 정착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료 현장에선 임종기와 말기의 구분이 모호해 의료진의 판단이 쉽지 않은 데다 말기인 경우 인공호흡기 착용과 콧줄을 통한 강제 영양 급식 등을 둘러싸고 환자·가족과 의료진 간 갈등이 심해 제도 시행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현실적 장벽들을 세밀히 파악해 제도를 손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시행에 들어간 통합돌봄도 연명의료 결정제 개선·보완의 모멘텀이 되고 있다. 통합돌봄 시대, 생애 말기 돌봄과 연명의료 결정은 더 이상 병원 중심의 틀 안에만 머물 수 없게 됐다. 국민일보에 ‘아름다운 배웅, 따뜻한 동행’ 칼럼을 기고 중인 김대균 인천성모병원 교수는 “이제 중요한 것은 환자가 살던 곳에서도 생애 말기 돌봄과 연명의료 결정이 실제로 이뤄질 수 있도록 제도와 전달 체계를 갖추는 일”이라고 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통합돌봄지원법 시행에 앞서 이를 뒷받침할 사회적 논의와 제도적 재설계가 충분히 이뤄졌으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 아쉽다.
지금의 연명의료 결정제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 문서 작성, 임종 과정 판단, 가족 확인, 의료기관윤리위원회, 이행과 기록, 사망 이후 절차까지 핵심 단계 대부분이 병원 안에서 이뤄지도록 짜여 있어 생애 말기 집이나 시설 등 살던 곳에서 보내며 임종을 맞는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연명의료 결정제도 개선은 단순히 임종 과정 환자에서 말기 환자로 허용 범위를 넓히는 등의 문제에 그쳐선 안 된다. 병원 중심 절차법으로 형성된 현행 제도를 지역사회 기반 생애 말기 돌봄과 연결되는 체계로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 일회성 서류 중심에서 지속적인 ‘사전돌봄계획(ACP)’과 대화 중심으로, 엄격한 가족 전원 합의에서 환자가 신뢰하고 가치관 및 선호를 잘 전달할 수 있는 대리 의사 결정 체계로, 병원 중심의 단절적 이행에서 재택의료센터와 호스피스의 유기적 연계로, 연명의료 보류·중단 행위 자체에서 결정 이후에도 지속되는 완화의료 돌봄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시급하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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