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소식
콧줄을 해야 하나요?
콧줄은 삼킴이 어려운 환자에게 인공적으로 영양을 제공하는 수단이다. 현정자 선생(1942년생)은 남편 한중식 교수의 투병 중 ‘콧줄을 해야 하나?’에 대해 짧고 굵게 고민했다. 결국 환자의 몸이 콧줄을 받아들이지 않아 정맥주사로 대신했다.
현행법에 따르면 연명의료 중 인공영양 공급은 마지막까지 중단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 실제 현장은 어떨까? 콧줄을 안 하는 것이 선택 가능할까? 현정자 선생을 인터뷰 하면서 더 많은 질문을 얻게 되었다.
고(故) 한중식 교수
정년퇴임과 암 진단
인터뷰 날, 선생의 봉천동 자택은 어떤 곳일까 생각하며 길을 나섰다. 도착하니 복도식 구축아파트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첫 집이었다. 처음 뵙는 선생의 모습은 활기차고 단단해 보였다. 실내에 들어서자 둥근 식탁이 먼저 방문객을 맞았다. 아담한 거실과 베란다의 화분들, 창밖으로 초록빛 풍경이 보였다. 작고 소박한 집이었다.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 회장께서 현정자 선생을 추천한 덕에 만남이 성사될 수 있었다. 현 선생께 본인 소개를 부탁했다.
“나는 모자라지만 않으면 부자라는 철학을 가지고 살았어요. 7년간 음악 선생을 하다가 남편 유학 갈 때 따라갔어요. 미국에서 10년간 지내고 와서 영어교사로, ‘각당복지재단(한국 최초의 민간 자원봉사 교육기관)’ 총무로 일했지요. 이후 YWCA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다 남편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집에 있게 되었어요. 이 집에서 편안하게 35년째 살고 있어요. 남편과는 재작년인 2023년에 사별했습니다.”
배우자인 한중식 교수(1940년생)는 숭실대에서 23년간 교목 겸 교수로 지냈다. 기독교 윤리와 기독교 철학 등을 강의했고 2005년에 정년 퇴임했다. 이듬해 여름, 남편이 바닷가에서 짧은 바지를 입고 있는데 무릎 위에 뭔가 솟아난 것이 보였다. 통증이 없어 본인은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 부위가 점점 딱딱해지는 것이 예사롭지 않아 병원에 갔고, 피부에 생기는 희귀 암 진단을 받았다. 수술을 했으나 같은 자리에 재발해서 다시 수술해야 했다. 이후 10년간 방사선 치료를 했다. 점차 쇠약해진 한 교수는 임종 전 1년 8개월간 와상환자(스스로 이동이 불가능해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로 투병 후 84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긴 투병, 길을 잃다
암 투병 후 한 교수는 당뇨 합병증으로 한쪽 눈을 실명했고, 치아가 흔들리며 난청이 오는 등 급격한 노화가 진행되었다. 어느 날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그가 갑자기 스르르 미끄러지며 넘어졌다. 이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고, 임종 때까지 침대에 누워 지내게 되었다. 가끔 섬망도 오는 것 같았다. “여보, 누가 자전거를 타고 방으로 들어오네.” 그의 말에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면 답이 없었다. 어느 날, 혼자 중얼거리는 것 같아서 뭐라고 했냐고 물었다. “주님, 길을 잃었습니다.” 그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 채였다.
한 교수의 투병 생활에 대해 좀더 자세한 말씀을 부탁했다. “남편은 기저귀를 찬 상태로 누워서 말할 힘이 거의 없었어요. 내가 ‘여보, 좀 웃어봐요’ 해도 입가가 움직일 뿐 웃지 못했어요. ‘눈 좀 떠봐요’ 하면 눈가에 경련이 일어나도 못 떴고요. 어떨 때 장난스럽게 옆구리를 쿡 찔러보면 움찔해요. 그런데 나중에는 발바닥을 간질여도 반응이 없는 거예요.”
혼자 병구완을 하는 현 선생에게 지인은 장기요양보험 신청을 하라고 알려주었다. 요양보호센터장이 방문하여 확인한 후 일주일 만에 장기요양 2등급을 받게 되었다. 1년 반 정도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다가 그가 그만둔 후, 딸의 도움을 받으며 돌봄에 전념했다.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며 말하곤 했다. “여보, 그래도 내 말은 들리는 거지요? 내가 냉면 해줄까요? 콩국수 해줄까요?” 냉면을 잘라주거나 국물을 떠먹이던 어느 순간, 남편이 말했다. “미안해.” 그 말을 듣고 바로 답했다. “뭐가 미안해요? 내가 아프면 당신은 이렇게 안 할 거예요?”
나중에는 기저귀로 감당이 안 되어 소변줄을 끼웠다. 결국 염증이 생겨 방광루(배에 작은 구멍을 내어 방광과 연결된 관을 통해 소변을 배출하는 방법) 시술을 해야 했다. 어느 날,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남편을 병원으로 이송하자 의사가 말했다. 콧줄을 끼워야 한다고.
콧줄에 대해
콧줄을 끼우고 싶지 않았지만 당사자의 생각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고민하던 중 딸이 말했다. “엄마, 이건 본인이 결정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잖아요. 이제 엄마한테 달렸어요. 만일 콧줄을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요? 사람이 먹는 걸 통해 포만감으로 오는 행복도 있잖아요. 지금 아빠 몸이 고통스러운 상태는 아닌 것 같아요. 영양 공급이 안 되면 한 달도 안 되어 돌아가실 게 뻔한데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잖아요.” 이렇게 말하는 딸 역시 혼란스러워 하긴 마찬가지였다. 결국 병원에 왔으니 의사 시키는 대로 하자고 결론 내렸다.
일주일 후 의사가 콧줄을 끼우려 시도했지만 계속 입으로 밀려 나오기를 거듭하여 삽입에 실패했다. 의사는 ‘환자가 너무 거부하는 상태라서 못 끼운다’고 하고는 직접 위에 구멍을 뚫겠다고 했다. 현 선생은 어찌할 바를 몰라 의사 눈치만 볼 수밖에 없었다. 영상의학과 교수들과 논의를 거친 의료진은 환자가 쇠약해서 전신마취가 어렵다고 했다. 결국 수술이 불가해서 정맥주사로 대신하게 되었다. 병구완 한 달이 되어갈 즈음 현 선생은 탈진하여 두 번이나 쓰러졌다. “내가 오늘 먼저 가는 한이 있어도 옆을 떠날 수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병원에서는 이제 할 일이 없으니 퇴원하라고 했다. 현 선생의 건강이 허락지 않아 환자를 집으로 모실 수는 없었다.
요양병원, 임종
인터넷에서 요양병원을 검색한 후 집 근처 한 곳을 방문했다. 살펴보니 깨끗한 분위기가 마음에 꼭 들었다. 한 교수가 입원한 병실은 모두 콧줄 낀 중환자들이 있는 곳이었다. 간호사실에서 환자 상태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병실의 벽이 없이 개방되어 있었다. 이곳에 있으면서 현 선생은 요양병원에 대해 새롭게 긍정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환자 면회는 2주에 한 번, 10분씩 가능했다. 한 번 면회를 다녀온 후 딸이 말했다. “엄마, 3월 16일이 56주년 결혼기념일이잖아요. 면회한 지 2주가 안 됐어도 제가 날 잡아놨으니까 면회하러 같이 가요.” 결혼기념일 면회를 마친 후 세 번째 면회 날이 돌아왔다. 현 선생은 남편의 귀에 대고 말했다. “여보, 우리 너무 재미있게 살았어요, 그쵸? 내가 당신 옆에 없을 때도 여기에 늘 같이 있는 거예요.” 딸이 옆에 있어 민망해도 그 말을 하고 싶었다. 집에 돌아온 다음 날 새벽 4시 반, 남편의 임종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다. 요양병원에서 한 달을 다 못 채우고 그는 세상을 떠났다. 병원에 도착해서 하얀 모포에 덮인 남편을 마주했다. 관계자가 장례절차와 장지에 대해 설명했다. 현 선생은 ‘시신 기증을 약속했으니 빈소 없이 보낼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들은 병원 영안실까지 캐리어로 고인을 모셔 간 후 은빛 철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제 가도 된다는 말을 들은 시간이 오전 6시 반쯤이었다. 장의사는 해부학 교수가 9시경 출근하니 기다리라고 했다. 두 시간여 기다렸다가 담당 교수를 만나 앞으로의 진행 상황에 대해 들었다. 교수는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 전화하라고 했다. 특별히 궁금할 것도 없었다. 공식 절차에 따라 서류를 작성하고 사인했다.
시신 기증에 대해
남편의 동료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나라 문화에 빈소도 없이 그렇게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냐고 했다. 현 선생은 답했다. ”우리는 오래전 시신 기증 서약하면서 다 얘기를 해놓았어요. 본인이 원하는 대로 했고요, 저도 그렇게 갈 거예요.“
장례식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현 선생께 여쭤보았다. “우리는 노년이 되면서 가야 할 자연스러운 길을 따른 거라 생각해요. 복잡하게 빈소를 차리면 봉투 받으려 하는 것 같이 느껴졌고요. 내가 상주 노릇을 하기도 그렇고, 미국에 사는 아들에게도 올 필요 없다고 했어요. 3천 불 주고 비행기 표 끊어서 와도, 고인은 안치실에 있잖아요. 아들에게 말했어요. ‘너 여기 와서 이틀 자고 가는데 뭘 하겠니? 오지 말고 엄마가 한 번 간다.’ 그래서 아들은 오지 않았고 그 뒤로 내가 두 번이나 미국에 다녀왔어요.”
시신 기증 서약을 할 때는 “뇌 기증만 할 것인가? 어디까지 기증할 것인가?”라는 구체적인 질문을 받았다. 현 선생 부부는 ‘뼈까지 다 부숴봐도 좋다. 뭐든 다 하시라’고 답했다. 현재 기증 절차에 따라 고인의 시신은 아직 이화여대 부속병원에 있다. 사후 2년 반이 지났지만 유족에게 최종 인계하는 절차는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긴 병에 필요한 것
현 선생은 생전에 남편과 마주 앉아 ‘당신 참 멋졌다’고 칭찬을 많이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 적은 있다. “하나님이 나를 참 많이 사랑하셨어요. 그래서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난 거예요.” 그 말을 들은 한 교수는 ‘오히려 하나님이 날 사랑하셨으니 당신을 만나게 된 것’이라 답했다. 남편의 임종 후 현 선생은 책 정리를 하다가 그가 써놓은 글귀를 발견하고 눈물 흘렸다. <사랑하는 아내 현정자 선생님 혜존. 역자 드림>. 한 교수가 번역한 책표지 안쪽에 적혀 있었다. 당시 현 선생은 미국에 가 있었는데, 남편은 그렇게 써놓고 멋쩍었는지 보여주지 않았다. 현 선생은 자신이 죽은 다음 이 책을 같이 화장해 달라고 할 생각이다.
현 선생은 지인 중 배우자 간병하는 분들을 흔히 보았다. 말기 상태가 길어지면 좋게 마무리하는 쪽보다 짜증과 분노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저 영감은 왜 안 죽나, 저러려면 차라리 죽지’,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었다. 아픈 기간이 오래되면 사이좋은 이들보다 반대 경우가 더 흔했다. 어떤 이는 와병 중인 남편이 스스로 기저귀를 빼버리고 침대에서 내려오다 떨어져 두 번이나 입원시켜야 했다. 간병인 비용을 포함한 치료비가 엄청나게 나왔다고 했다. 계속 일을 저지르는 남편 때문에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울면서 전화하기도 한다. 치매 남편을 간병하다 아내가 먼저 쓰러져 사망한 경우도 봤다. 한 후배는 현 선생에게 전화로 한탄했다. “언니는 남편분이 잔소리 안 하고 짜증도 안 내니 정말 다행인 줄 알아야 해요. 저는 기저귀 갈아주면서 남편 머리를 팍팍 때려요. 다 말하려면 끝도 없고 정말 속상해요. 왜 저러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간병 시기를 애틋하게 보낸 현 선생께 물었다. 간병에 필요한 마음 자세가 무엇인지를. 대답은 간단했다. “아프기 전에 서로에게 긍휼한 마음이 생겨야 돼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죽음 준비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시행 첫해인 2018년, 등록기관인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에서 현 선생 부부는 함께 의향서를 작성했다. 이전부터 계속 관심을 갖고있던 터였다. “마지막에 인공호흡기를 끼고 힘들어하는 건 하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우리 둘 다 ‘죽기 전 고통을 연장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일치했지요. 등록한 후 참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등록카드는 항상 지갑에 넣어 다니고 있지요.”
시댁 작은아버님의 임종 때 현 선생은 연명의료 중단을 주도했다. 임종 예배를 위해 부부가 함께 병실을 찾아 그 댁 식구와 함께할 때였다. 수혈 팩 네 개가 달렸는데 그중 두 개는 혈액이 들어가지 못하고 멈춰 있었다. 현 선생이 장녀를 불러 연명의료를 꼭 해야 하냐고 물었다. 그가 답했다. ”아무도 이걸 빼라는 얘기를 못 하고 있는데 언니가 오늘 해줄래요?“ 현 선생은 가족들에게 조심스레 치료 중단을 제안했다. 그들의 동의를 얻은 후 의사 회진 때 말했다. ”선생님, 저도 이 집 식구인데 이거 다 빼주세요. 우리 모두 그렇게 결정했어요.“ 의사는 다시 한번 형제들의 뜻을 확인한 후 모든 줄을 제거했다. 작은아버님은 이틀 쯤 후에 운명하셨다.
현 선생은 자신의 생애 말에 대해 분명한 의사를 밝혔다. ”내가 임종을 앞두게 되면 누구를 오라고 해서 덕담할 것도 없어요. 살아온 걸로 이미 할 말은 다 한 거니까요. 나는 콧줄을 선택해야 할 상황이 되면 하지 말라고 자녀들한테 의사를 밝혀 두었어요. 그리고 내가 헛소리를 하거나 돌봄이 필요해지면 꼭 요양원에 간다고 해두었죠. 만일 앞으로 허락된다면, 내가 의식이 없고 소생이 힘들 때 편안히 숨을 거둘 수 있도록 의사의 도움을 받고 싶어요. 이후 바로 시신 기증할 병원에 싣고 가서 해부하고 떠나게 하면 얼마나 좋아요? 모두가 잠자듯이 가기를 원하면서 왜 의사 조력 사망은 반대하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아이들한테는 아빠가 떠난 그대로 나도 빈소 없이 시신 기증 절차대로 보내라고 했어요. 애들은 엄마 말에 전혀 토 달지 않고 바로 동의했지요.“
의료인류학자 송병기는 말한다. 콧줄이 환자의 목숨을 유지하게 하더라도, 그 삶의 연속성과 통합성을 무시하거나 파괴하는 효과를 낸다면 이를 의료 문제로만 다룰 수 있겠냐고. 현 선생이 말한 의사 조력 사망(안락사) 문제도 우리 사회가 하나의 답만을 강요하지 않기 바란다.
현 선생은 인터뷰 질문지를 받아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고 했다. 이렇게 좋은 질문이 있고 함께 나눠야 할 얘기가 있는데, 하나도 못한 것이 아쉽다고 했다. “일찍부터 우리가 죽음에 대한 얘기를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런 얘기를 못했다는 게 정말 아쉬워요. 노년이 되기 전 한 50대쯤의 사람들부터 모집해서 죽음 교육을 시키세요. 그래서 그들이 20년이나 30년 더 사는 동안, 가족이 얼마나 소중하고 옆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귀한지 꼭 알려주세요. 미리 죽음에 대해 얘기할 기회를 갖는다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 노년이 되기 전에는 바빠서 미처 생각 못하고, 일단 아프기 시작하면 감히 그 얘기를 못하거든요.”
뒷글
인터뷰를 마친 후, 어느 작가가 말한 ‘죽음 이전의 존엄생’이란 말이 떠올랐다. 한중식 교수 부부가 걸어간 길의 첫 발자국이 뚜렷하게 보였다. 이를 따르는 후배로서 나는 그들의 생애말 이야기를 마음 깊이 새기려 한다. 한 시인의 시구와 함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정호승, 「부치지 않은 편지」중에서, 『새벽편지』(1987)
※ 인터뷰에 참여해 주신 현정자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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