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소식
봄이 왔다. 어깨위로 내려앉는 햇살이 너무도 따사롭다.
신촌세브란스 암병원 빌딩 안으로 분주히 들어서는 사람들 속에 섞여 빨려들 듯 에스컬레이터에 오른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수납 창구 벤치에는 사람들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을 지나서 상담실 문을 닫으면 정적이 흐른다. 창문 밖으로는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바삐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소리 없이 흐른다. 테이블 세팅과 상담에 필요한 서류를 찾아 준비를 마치고 핸드폰 알람과 노크 소리에 귀를 세운다.
오늘로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상담 봉사 4일째다.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모르는 부담감이 3일째를 넘기면서 긴장이 가라앉고 평소의 호흡을 되찾았다. 열심히 살다가 어느 날 날벼락처럼 들이닥친 질병을 안고 또다시 치료를 위해 열심히 동분서주하는 환자들, 모호한 길을 헤매는 환자들과 차분히 대화를 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이해력과 집중력도 떨어진다. 자신이 처한 절망적 상황을 혼란스러워하는 내담자들을 보면서 이렇게 중요한 결정을 하기에 시기가 늦었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래도 이쯤에서 이런 결정을 하게 된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눈빛이 작은 위로와 격려가 되기를 바라며 오늘도 따뜻하게 한 사람 한사람을 맞이하기를 기도한다. 사전연명의료 의향서 등록 상담을 하면서 문득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한가지 기억이 떠오른다 13년 전에 돌아가신 엄마의 기억이다.
2008년도는 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되기 전이다. 엄마는 뇌경색으로 수술을 하셨지만 편 마비가 되셨다. 입원기간 제한 때문에 2년동안 병원을 옮겨 다니며 재활치료를 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엄마는 재활을 원치 않았다. 너무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낸 엄마는 간호사의 처치와 요양보호사의 친절한 보살핌을 좋아하셨다. 많은 형제의 장녀로, 가부장적 남편의 아내로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은 기억이 별로 없었던 엄마에게 병원 생활은 따뜻하고 행복한 경험이었던 것 같다 나는 많은 짐을 지고 고단한 삶을 살아낸 엄마의 심정이 너무도 이해되었다.
당시는 요양원 제도 시행 초기였고 마침 국내 최대의 요양원을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수탁 운영하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얼마 기다리지 않아 입소를 하게 되어 4년동안 좋은 시설의 요양원에서 지내셨다. 외부 병원에 장기간 입원치료를 하게 되면서 기한 초과로 재 입소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용인에 있는 요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몇 달 만에 엄마의 건강이 악화 되었고 엄마는 소도시의 병원에서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 며칠을 지내게 되었다. 나는 엄마를 작은 병원에서 손도 써보지 못하고 마지막을 맞게 하고 싶지 않았다.
종합병원에 근무하시는 교회 장로님의 도움을 받아 급히 엄마를 서울로 옮기게 되었다. 병원 이동은 꽤나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엄마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엄마를 면회하러 갔을 때에야 비로서 엄마의 코와 목과 연결된, 그리고 알 수 없는 여러 개의 줄들과 인공 호흡기와 기계장치들을 보았다. 엄마는 그 곳에서 하루를 지내시고 새벽에 소천하셨다. 하루동안이라도 큰 대학병원에서 최선의 치료를 받았다는 생각에 엄마가 작은 병원에서 마지막을 맞게 하고 싶지 않다는 절박한 마음에 위로를 받았다.
임종하신 엄마의 심장이 여전히 뛰고 있어서 잠시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기계로 심장을 뛰게 해주는 연명의료 장치였던 것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아찔하다.
엄마가 그 상태로 연명을 하게 되었다면 어쩔 뻔 했을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처할 뻔 하지 않았겠는가? 엄마의 의사와 무관하게 육체의 고통 속에 묶어두고 쉬지도 못하게 하는 잘못된 선택이 될 뻔했던 것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상담사가 된 지금 나는 엄마를 통한 이 경험이 나이 듦과 존엄한 죽음, 의미 없는 연명치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데 크나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엄마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는 막내딸에게 메시지를 던져주고 가신 것이다.
엄마가 뇌경색으로 누우시면서 나는 사회복지 공부를 시작했고 상담학까지 진학을 하게 되었다. 부지런히 배우고 나누는 삶을 꿈꾸며 죽을 때까지 공부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리라 마음을 먹었다.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이 세상에 살면서 내가 받은 모든 것이 누군가의 나눔과 따뜻한 손길이었고 나는 그 사랑에 빚진 자임을 깨닫게 되었다.
지난해 우연히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상담사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되었다. 관심이 생겼다. 처음에는 내가 시간에 구애없이 할 수 있는 직업으로서의 가능성을 생각했다. 일년 가까이 검색해보고 문의를 해 보았는데 접근이 쉽지 않았다. 좀처럼 열리지 않는 문을 포기하려고 마음먹은 다음날 국가생명윤리정책원 연구원으로 계신 지인으로부터 이메일 한통을 받았다. 사실모 레터였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상담사 교육 공지가 들어있었다. 그동안의 기도와 시도가 헛되지 않은 결과였다.
상담사 교육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왜 필요한지를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잘 구성된 심도 있는 커리큘럼이었다. 지명도 있는 강사진과 함께 사실모 기관도 보건복지부 지정 등록기관으로 신뢰할만한 단체였다. 어떤 곳인지 알지도 못하고 도착한 곳이 나에게 준비된 곳이었다. 수료를 하고 난 후 실무를 경험하기 위해 봉사 할 기회를 갖고 싶다는 표현을 했는데 대표님이 기억하시고 세브란스 상담실 봉사자로 불러 주셨다. 함께하는 상담사 선배 선생님들은 따뜻하게 환영해 주시고 친절하게 도와주셨다. 명분 있는 관계 안에 들어선 안정감과 든든함이 있었다. 그들은 나와 함께 서로 존중하며 서로 도우며 함께 걸어갈 동역자들이다. 내게 소중하고 멋진 만남이 주어진 것이다.
앞으로 내 앞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나는 설레인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나이 듦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젊고 건강하고 실용적인 인간만이 대우받고 존중 받는 이 세대 가운데 노년으로 건강하고 당당하게 살아낼 일을 계획해본다. 지금까지 공부하고 경험한 삶으로 다시 써 내려갈 인생 후반전을 기대한다. 나 자신을 돌보고 새로운 삶의 지식을 받아들이고 생각을 다듬어 나갈 것이다. 바야흐로 백세 시대가 도래하고 한국은 초고령사회로 접어들었다. 바라기는 이 시대의 노년으로 죽을 때까지 현역으로 살고 싶다. 내게 힘이 있는 한 누군가에게 나눠줄 것이 있다면 그보다 더 복된 일은 없을 것이다. 나이 듦이 행복한 노년의 삶을 꿈꾸며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상담사로서 백세시대의 첫 발을 내딛게 된 것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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