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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사연 29 - 구술작가라는 낯선 이름(박현자 구술작가)
    2024-10-06 17:10:28
    관리자
    조회수   149

    황광옥 선생님과 함께.png

     

    어제는 2019년에 구술작가라는 생소한 작명을 갖고 처음으로 인터뷰했던 황광옥님(사진 왼쪽)과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황 선생님이 70대 후반일 때 만나서 이제는 여든 셋이라는 연세가 되셨다.  그사이 황 선생님의 숙원이었던 남편의 유골을 중국에서 모셔다 일본 국립묘지에 무사히 안치하셨다. 너무 좋으셨는지 일본에 가시기 전부터,일본에 가셔서도 몇 번이고 연락을 주시고 그곳 현충원의 사진도 보내주셨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씀까지 덧붙여서. 
     
    2019년 사실모에서 진행한 구술자서전 프로그램에 선뜻 나서게 된 것은 사실 황광옥 선생님 때문이었다. 수원시 평생학습관의 일본어교실에서 만난 황 선생님이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나 살아온 거 다 얘기하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해. 얼매나 기가 막힌 세상을 살았는지 몰라’였다. 그러면서 한 두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주시곤 했는데 중국에서 태어나서 살아오신 분이라 그것만으로도 특별했다. 황 선생님의 넋두리를 자주 듣다보니 뭔지 모를 의무감이 생겼다. 그러다가 사실모의 구술자서전 사업얘기를 들으니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 싶었다. 글을 써 본 경험도 별로 없었고 더구나 구술자서전이라는 단어 자체가 무척 생경하게 느껴질 정도였기 때문에 용기가 필요했지만 황 선생님의 한을 풀어드리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컸는지 감히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황 선생님의 자서전을 시작으로 해마다 소중한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황 선생님과 세 차례의 인터뷰를 하는 동안 살아온 얘기를 하시다가 당신 설움에 못이겨 한참을 울다가 말하다보니 진도가 못나가고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리기도 했지만 그 과정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실 때까지 기다렸다. 황 선생님은 중국 동포로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고 우리 민족의 고난을 고스란히 겪어낸 분이라 특히 더 마음이 쓰였고 애틋했다. 마치 우리가 그 분에게 빚을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선생님의 생애사를 듣고 나니 남같지가 않아서 여지껏 끈끈하게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가끔씩 찾아 뵙기도 하고, 전화로 안부 여쭙고 카톡으로 문자를 나누고 있다. 황 선생님 역시 중간중간 소식을 전해주신다. 


    2021년에 만나 뵌 백복녀님은 소녀같은 인상에 여리여리한 분이었다. 강원도 영월에서 8남매 맏이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 사촌언니집에서 식모살이(가사도우미) 하다가 버스 안내원으로 일했다. 결혼해서 애 둘을 낳아 대학까지 보낸 후 뒤늦게 평생 한이었던 공부를 시작해 예순이 넘어서 대학졸업장까지 받아든 학구파이시다. 귀한 손녀딸을 보시고 마냥 행복해하시며 요즘에도 컴퓨터 보조강사로 봉사하며 살고 계신다.


    2022년에는 중도시각장애를 가진 남궁광수님과 만났다. 남궁님의 경우는 믿기 힘들 정도로 하루아침에 시각을 잃게 되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급성간농양에 의한 패혈증’으로 목숨을 구하기 위해 양쪽 눈을 적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동차부품회사에 취직해서 현장생활부터 차곡차곡 쌓아나간 덕분에 현장에서 필요한 기술혁신과 인력관리,업무효율을 올릴 수 있는 각종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회사 최초로 현장직원에서 관리직원으로 승진했을 뿐만 아니라 기술명장으로서 대통령상까지 수상할 정도로 잘 나가던 사람이 갑작스런 실명으로 삶의 의욕을 상실했다. 가족을 생각하며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었고 특히 그런 사정을 다 알고도 기꺼이 함께하기로 한 부인 덕분에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 지난 8월에는 남궁님이 경기도 시각장애인도서관에서 개최하는 낭독회에 초청받아 자신의 작품을 낭독할 기회를 가졌다. 안마사로 일하면서 봉사도 열심히 하셔서 각종 봉사상이 잔뜩 쌓여가고 있다고 들었다. ‘두 눈으로 볼 수 있었을 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두 눈을 잃고서 비로소 보인다’는 고백을 들으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2023년도의 박헌명 선생님은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비가 없는 삼군사관학교에서 공부하고 직업군인으로 수 년간 강원도 최전방에서 복무하셨다. 당시 지뢰제거작업을 지휘하던 중 폭발로 인해 세 명의 부하를 잃고 평생 죄책감을 갖고 해마다 국립현충원에 가서 참배하신다. 퇴역 후에는 학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에는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장학사업을 위해 봉사하셨다. 요즘은 시와 수필쓰는 재미에 푹 빠져서 뒤늦게 등단까지 하셨다며 나에게도 박 선생님의 시와 수필이 실린 문예지를 두 권 전해주셨다. 시나 수필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선생님의 어린시절과 할머니의 사랑,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잘 다듬어진 글로 표현해 주신 것 같다. 글쓰기는 나이든 사람들에게 아주 좋은 취미이고 치매예방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올해에는 성북점자도서관에서 시각장애인 열 한 분의 구술자서전을 모아 점자책으로 펴낸다고 한다. 영광스럽게 구술작가의 한 명으로 그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제비뽑기로 두 분의 시각장애인과 만났다. 6월 마지막 주와 7월 첫째 주에 전철과 마을버스를 타고 창신동의 아파트로 이춘금 선생님을 만나뵈러 갔다. 온 몸이 땀으로 젖을 정도로 더운 날이었다. 식탁에 앉아서 인터뷰를 하는데 두 시간을 넘겨가며 선생님의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었다. 누가 들어도 놀라울만큼 열심히 신앙심에 기대어 ‘망막색소변성증’에 의한 시각장애를 극복해 나가셨다. 거기에 더해 유방암에 걸렸을 때에도 가족들의 격려와 지지속에 신앙의 끈을 놓지 않고 투병했던 모습이 그 자체로 ‘인간승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인터뷰 때는 더 많은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었고 독일유학시절의 이야기는 우리 부부의 유학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두 번의 인터뷰로도 부족해서 전화와 이메일로 보충해야했다. 지면은 한정된 반면에 내용이 너무 방대해서 무엇을 빼고 무엇을 넣어야 할지 내 얄팍한 능력으로 마지막까지 고민이 많았다.


    또 한 분, 김종성님과는 수원의 경기도 시각장애인연합회 휴게실에서 두 번의 인터뷰를 가졌고 원고를 완성한 후 사실확인을 위해 다시 만나 뵈었다. 원고를 천천히 읽어드리면서 내용이해가 잘 안된 부분은 자세히 여쭙고 지명이나 사람 이름 등을 수정했다. 김종성님의 경우에는 선천적인 장애는 아니었지만 한국전쟁 중인 겨우 세 살 때 실명되었기 때문에 선천적인 장애나 마찬가지로 실명전의 기억이 거의 없었다. 강원도 산골에서 그것도 전쟁통이라 아무런 의료혜택을 못받고 무방비로 실명에 이르렀다. 가장 가슴이 아팠던 것은 어린 나이에 부모님 곁을 떠나서 춘천의 맹학교에 들어갔는데 학습환경도 식사도 인격적인 대우도 모든 것이 열악하고 불합리한 조건에서 견뎌내야 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한창 자라날 시기에 먹을 것이 부족해서 늘 배고파했다. 한국전쟁 직후라 인구는 많고 물자는 부족했으니 오죽했을까.어려운 여건이지만 좌절하지 않고 세상을 헤쳐 나갔던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하고 존경스럽다.세상에 둘도 없는 단짝인 아내분을 병으로 먼저 보내고 혼자서 외롭게 지내고 계시는 김종성님이 밥상에 같이 앉아 도란도란 얘기 나눌 반려자를 만나셨으면 하고 바래본다. 
     
    2019년부터 시작해서 뜻하지 않게 구술자서전 작업에 참여하게 된 것을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가족이라도 자신의 얘기를 때로는 내밀한 부분까지 털어놓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대상자분들이 공통적으로 ‘이 얘기는 우리 애들도 몰라, 우리 남편도 몰라, 우리 아내도 몰라’ 라고 말한다. 너무 힘들어서 또는 부끄러운 얘기라서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도 하고 싶지 않았던 얘기 보따리를 내 앞에서 풀어놓는다. 짧은 만남이지만 인터뷰가 끝나고 글이 완성되면 아주 옛날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처럼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나로서도 그 분에게 계속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귀기울여 듣다 보면 소중하지 않은 삶은 없고 경이롭지 않은 삶은 없다. 그리고 인생에 정답은 없는 것 같다. 똑같은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그것을 헤쳐나가는 방식은 십인십색,백인백색일 것이다. ‘어떤 게 더 낫다’라는 것도 없다. 각자 자신의 가치관과 능력에 따라 선택해 나갈 뿐이다. 신기하게도 구술작가가 한 사람의 생애를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공감하고 배우듯이 대상자 또한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자존감이 높아지고 앞으로 남은 삶의 방향을 찾아간다. 


    비록 힘들고 고달픈 삶이었지만 주어진 상황에 머물지 않고 누구보다 주체적으로 삶을 개척해 나갔던 모든 분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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