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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사연 34 - 고유한 이야기를 꺼내는 일(고라해 작가)
    2025-08-01 19:59:29
    관리자
    조회수   50

    고라해 선생님 홈피 사진2.png

     

    내가 처음 구술자서전을 통해 만난 분은 어머니 친구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로부터 그분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건 몇 해 전이다. “대학교 때 오토바이를 타고 이곳저곳 땅을 보러 다녔다더라”라는 어머니의 말이 유독 인상 깊었다. 듣자마자 ‘신여성’이라는 단어가 떠올랐고 한 번 만나 뵙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928년에 황해도에서 태어난 어르신은 당시 93세였다. 코로나가 심했던 시기라 마스크를 쓴 서로의 얼굴을 보고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6.25전쟁 당시 격동의 시기를 통과하면서도 남한으로 내려와 강인하고 유연하게 삶을 이어왔다. 피란길에 오르며 마지막으로 뒤돌아본 집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비록 내가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다시 만나지 못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느껴졌다. 그 시절 장녀들이 그러했듯, 어린 나이에 소녀 가장이 되어 가족의 생계를 감당해야 했다. 늦은 나이에 부모님 결정에 순응하며 결혼했지만, 어르신의 삶의 중심은 늘 가족 중심이었다. 남편의 무뚝뚝함과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묵묵히 흔들리지 않을 수 있던 건 글쓰기였다. 

    언제부터 시작하셨냐는 나의 물음에 어르신이 자랑거리가 있다며 분홍 보자기를 풀어서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차곡차곡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 온 수첩들이었다. 귀퉁이가 닳은 수첩이 여러 권 있었다. 모두 자신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써 내려간 인생의 기록들이었다. 혹시라도 기억이 희미해지면 자신이 살아온 흔적을 잊어버릴까 봐 고향 주소부터 이사 다닌 곳들, 고마웠던 지인들 이름까지 빠짐없이 적는다고 했다. 오래전의 수첩은 또박또박한 글씨였지만 최근에 사용하는 수첩에는 어르신이 손이 떨려서 삐뚤빼뚤한 글씨들이었다.

    “여기에는 나의 역사가 들어가 있어.”

    내가 경험한 바로는 구술자서전 작업은 인터뷰보다 더 나아간 작업이라 생각한다. 진정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상호 간에 신뢰가 전제되어야 하며, 그 신뢰는 교감과 경청을 통해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와 침묵, 눈빛과 몸짓처럼 말보다 많은 것을 전하는 순간들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마음이 열리는 순간, 어르신들은 삶의 가장 깊은 곳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놓는다. 인터뷰하다 보면 “이 얘긴 우리 자식도 몰라요.”라며 조심스레 삶의 고비를 꺼내 놓는 분들이 계신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물이 고이기도 한다. 그래서 구술자와 구술작가는 몇십 년을 알고 지낸 사람처럼 정이 깊어진다.

    “그래도 지금에 감사해요. 최선을 다해 살았으니까요.”

    노년기를 보내는 어르신들은 회고를 통해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되새긴다. 이 과정에서 긍정적인 기억뿐 아니라 부정적이고 아픈 기억도 떠올라 당시의 감정이 떠올라 힘들어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거의 분노나 죄책감이 다시 재구성되면서 현재의 자아가 의미를 찾고, 그 과정이 내면의 치유로 이어진다.

    구술작가가 하는 작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혹자는 대필 작가 혹은 구술자가 이야기한 대로 글로 옮겨 적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말이 품고 있는 삶의 결을 읽어내야 한다. 때로는 표현되지 않은 감정이 느껴질 때, 조심스럽게 되짚어야 한다. 그래서 구술작가는 단순한 기록자가 아니라, 삶의 맥락을 해석하고 정리하는 ‘해설자’이자 ‘공감자’이다.

    어르신이 감정이 북받치면 인터뷰를 중단하기도 하고, 너무나도 방대한 삶 앞에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덜어야 할지 고민도 깊어진다. 하지만 결국 나를 다시 책상 앞에 앉게 만드는 건 단 하나이다. 구술자의 진심과 삶을 온전히 글로 담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다. 구술을 마치고 원고를 다듬은 후, 자서전의 첫 문장을 정할 때면 언제나 긴장감이 찾아온다. 제목은 어르신의 삶을 상징하는 문장이 되어야 하며, 첫 문장은 독자를 그 삶 속으로 초대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 차례 퇴고를 거치면 불필요한 것들이 걷혀 잘 세공된 보석처럼 완성이 된다. 그 순간부터 이야기는 기록이 아니라, 읽히는 삶이 된다. 무엇보다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완성된 자서전을 전달하는 날이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죽기 전에 이렇게 내 삶을 정리할 수 있어 마음이 놓인다.” 그 한마디에 그 한마디는, 내가 쓴 모든 문장과 시간을 의미 있게 해준다.

    나는 조부모님과의 추억이 부족했던 만큼, 어르신들과의 시간을 통해 그 빈자리를 채워간다. 이야기를 들으며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나는 어린아이로 돌아가 있다. 오히려 내가 치유받고 감사한 마음이 드는 순간들이다. 나는 이 작업이 단순한 기록이 아닌 ‘관계의 예술’이라 믿는다. 타인의 삶으로 들어가는 경험이기 때문에 삶을 마주하는 태도도 배운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기록은 과거를 남기는 게 아니라, 존재를 인정하고 기억을 잇는 행위임을 깨달았다. ‘누군가의 삶을 말하고 들을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소중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써 내려가고 싶다. 특히 소외된 목소리, 쉽게 잊히는 존재들의 서사를 세상에 들려주고 싶다. 자서전 작업은 나에게 사람을 사람답게 바라보는 시선을 가르쳐 주었다.

    기억을 엮는 사람으로서, 나는 오늘도 누군가의 삶 앞에 공손히 앉는다. 고유한 이야기를 세상 밖에서 반짝이기를 바라며, 다시 한 문장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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